카테고리 없음

가랑잎이 물들면

청운(靑雲) 2022. 9. 22. 05:39

가랑잎이 물들면

靑雲. 丁鉉德

혹독한 겨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삼동을 알몸으로 버티고
이른 봄날 왕눈으로 튀어 난 잎새로
떡잎 같은 새살림을 차린 삶
떨어진 잎새는 꽁꽁 언 땅 이불을 덮어주고
새봄맞이 피어난 잎새 하나

머리에 갓을 쓰고 떨어진 홀씨
너구리 담비 산토끼 먹이사슬로
굴속에 숨었다가 잉태한 가랑잎 나무 하나
손바닥 같은 사슬로 나풀거린다
옛날에는 지게꾼의 낮자루에 목이 잘려
두엄자리가 내 집이었는데

빽빽이 줄 선 산등성이
산바람에 휘청거리며 살아온 설음
비록 하찮은 하나의 나뭇잎이지만은
봄 옷을 갈아입고
누렁 갈색으로 변신한 항혼길이
첫사랑을 잃어버린 이방인이 된다

오솔길 길바닥에 누워
지나가는 사람들 발소리에 놀라
바스락 소리 지르며 통곡을 한다
떼거리로 몰려온 산악인들이 지나가면
온몸이 뭉그러져 만신창이가 된다
이럴 땐 신문고를 울릴 장소도 없다

때는 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다
이별을 앞둔 가지와의 만남
혜어짐의 슬픔이 앞을 가려오는데
심술쟁이 바람둥이가 어깨를 친다
가랑잎이 물들면
세상도 조용히 겨울잠 꿈속에 든다
220922